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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하고 지극히 현실적인

고생하는 것만이 청년은 아니다


 In 광화문, with 아이폰 6S+


꽃보다 청춘에서 강하늘이 한 말이다. 맞다, 동의한다.

어쩌면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고생을 강요하는 건, 이 사회의 잘못된 관행인지도 모른다. 사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현재의 기성세대들이 청춘을 보낸 때는 누구나 고생하던 시절이었고, 고생을 하면 그에 응당한 Output이 나오는 시대였다. 우리네 할아버지 세대부터 아버지 세대까지는.


사회의 모든 분야가 고도로 성장/팽창하던 때였고, 노동 수익이 자본수익을 뛰어넘는 시대였다. 땅에 묻어 둔 자원이 없으니, 사람이 제일 큰 자산이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노동의 가치도 현재보다 높았다. 돈으로 돈을 버는 것보다 일해서 돈을 버는 것이 빨랐다. 그래서 우리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청년이었을 시절엔 그들이 어떤 분야에서 일을 하든지 간에, 생활비를 알뜰하게 쪼개 쓰고 저축을 하면, 집을 마련하고 아이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대학에 간 세대가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 세대다. 베이비붐의 끝 세대.


물론 그때도 영리한 만큼 (필자가 쓰는 영리하다는 말은, 학교 성적이 잘 나온다는 말이 아니다) 더 큰 성공을 하고, 더 많은 재화를 벌어들일 수 있었겠지만, 그 차이는 지금만큼 크지 않았다. 어차피 다 같이 잿더미에서 시작했으니까, 물려받은 자산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걸 이루어야 했다. 누구든 가진 능력에 합당한 급여를 받았기에 물려받은 재산 없이도 뭔가를 이뤄낼 수 있었다. 그래서 소득격차는 있을지라도 재산 격차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사회적 분위기도 그랬다. "으쌰 으쌰 같이 만들어 보자”. 점점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니까. 그리고 그 희망이 현실로 다가오는 시간이 굉장히 짧았기 때문에, "꿈"이라는 말은 "곧 현실이 될 것”이라는 말과 같았다. 사회 전반에 무엇이든 이루어질 것이란 믿음이 깔려 있었고, 그 시너지는 대단했다.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사회적 이슈들의 경우에도 사람들이 나서서 목소리를 내면 먹혀드는 시절이었다. 이래저래 열심히 나라를 말아먹은 초대 대통령 이씨도, 자기 맘대로 헌법을 주무른 아버지 박씨 때도(역시 그 아비에 그 딸….), 도시 하나를 특수부대로 밀어버린 폭군 전두환 때도, 피를 쏟아야 할지언정, 사람들이 모여서 들고일어나면 잘못된 사회를 뒤집어엎을 수 있었다. 우리 손으로 똘똘 뭉치면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그 믿음은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와 금가락지를 모아 IMF 위기를 넘기기에 이른다. 그렇게 그들은 전쟁 이후 두 세대에 걸쳐 잿더미에서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냈다. 물론 짧은 시간 안에 올려놓은 터라, 시작부터 심각하게 잘못 꿰어진 단추들이 꽤 있긴 하지만 신세대인 내가 봐도 일단 이만큼 올려놓은 게 어딘가 싶기는 하다.




기성세대는 청년을 돕지 않는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고생하는 것만이 청년은 아니다. 아니 이제는 청년들이 고생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시대가 아니다. 고생을 할래도 획기적으로 해야 하고, 영리하게(영악하면 더 좋다) 해야 한다. 기성세대 모두가 한국을 만들었지만,

그중에 일부(대표적으로 친일 하던 사람들과 그 자식들)는 7-80년대 부정/불법 정부 시절에 재화를 긁어모아 재벌과

정치인이 됐고 이젠 그 밥그릇을 지키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이쯤에서 새누리는 좀 찔릴 필요가 있다.(새누리의 역사를 따라가 보면 그들이 친일, 독재 옹호를 지속적으로 주장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적당한 때에 이름 바꿔서 물타기 하고..) 이미 그 밥그릇은 철옹성인데 아직도 안심을 못 하는지, 그들이 만드는 정책들은 젊은 사람들을 돕는 쪽에 서지 않는다. 안타깝지만 젊은 사람들을 돕는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힘이 없다. 솔직히 야당이 하는 짓을 보면 좀 답답하다.

야당을 한자로 풀어 보면 野党 [들판, 변두리 야]와 [무리 당]이다. 야성, 야생의 “야”와 같은 글자다. 그러니까 들판에 살면서 야성을 키운 사람들의 무리가 야당이어야 하는데. 왠지 변두리 들판엔 모자란 것들만 살았나 보다...


슬프지만 기성세대의 전반적인 인식도 젊은 사람들을 돕는 쪽에 서지 않는다. 같은 시절을 살았기에 그들은 하나의 일관된 프레임을 가진다. “젊은것들은 열정이 부족해”. 아 꼰대들의 명대사를 빼먹을 뻔했다. “우리들 젊었을 땐 말야..."

이 사회의 기성세대들은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개발도상국, 팽창기라는 시대적 배경 덕분에 뭔가를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인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존심이 상해서일까. 까놓고 말하자. 절대적 능력치로만 따지면 기성세대들 젊었을 때보다 지금의 신세대가 더 많이 배웠고, 더 잘났다. 근데 청년들이 살기에 사회는 오히려 답답해졌다. 어쩌면 "우리가 만들었으니 감사해라” 내지는 "우리가 고생한 만큼 너네도 좀 고생해봐라” 하는 생각이 깔려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미안하지만, 이 글은 어떤 솔루션을 제시하기 위해 시작한 글이 아니다. 나도 잘 모른다. 그 솔루션은. 그런 게 있다면 누가 가르쳐 줬음 좋겠다. 다만, 해결책은 없을지라도 최소한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떤 사건들로 인해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싶었다. 적을 이해하면, 남은 건 나를 이해하는 것뿐이니까. 옛날처럼 뭔가 한다고 다 되어지지 않는다. 뭔가 해 보려면 이미 누군가 해 놓은 거고, 또 뭔가 해 보려면 잘 도와주질 않는다. 삶이 팍팍해졌는지, 기준이 높아졌는지 뭘 만들어 내다 팔아보려 해도 사람들은 웬만해선 지갑도 잘 열지 않는다. 그 정도 기준을 만족시키는 뭔가를 만드는 건 거대 프랜차이즈가 예쁘게 독식하고 있다. 커피도, 빵도, 밥도 그리고 여러 가지 제품들도. 그래서 영리해야 한다. 아까도 짧게 언급했듯, 현재 한국의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하는 건, 300년 전(그러니까 산업혁명 시절 즈음)에 숙련된 공장 노동자를 생산하기 위해 독일에서 만들어 놓은 시스템에서 성과를 잘 낸다는 의미일 뿐이다.




똑똑함과 영리함은 다르다

똑똑하면 그 시스템 안에서 성공할 수 있다. 원래 있던 것들을 빠른 속도로 잘 받아들이는 것, 그게 일반적인 의미의 똑똑함이다. 대표적으로 법조계와 교육계를 예로 들겠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똑똑하면(똑똑한 건 노력으로 어느 정도 커버가 된다) 중간은 간다. 다만 중간을 하기까지 피 터지게 싸워야 할 거다. 당신의 형편에 따라 출발선도 다르고, 결승점까지 이용할 이동수단도 다를 거다. 시작 자체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불리할 수도 있다. 그와 다르게, 영리하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애플, 에어비엔비, 페이스북 같은. 그런 것들 있잖은가. 원래 없던 것들. 새로 생기는 것들 말이다. 똑똑함과 영리함은 그렇게 다르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이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시스템 안에서는 경쟁을 견뎌내야 하고, 시스템 밖에선 교과서가 없는 답답함을 견뎌내야 한다. 그리고 결과도 모 아니면 도뿐이다.


영리하다는 건 누가 무슨 얘기를 해도 내게 필요한 것들을 능동적으로 찾아 공부하는 데서 시작한다. (보통 그것들은 교과서 밖에 있다) 영리하다는 건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판 안에서 노는 게 아니라 그 밖으로 뛰어나가 새로운 판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영리하다는 건 통찰력을 가지고 사람들의 잘못된 믿음을 무시하며 올바른 방향으로 뛰어갈 수 있는 능력이다.


힘든 얘기들만 써 놨지만, 저게 진실이다. 난 그래도 당신이 영리하게 움직였으면 좋겠다.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판이, 우리가 뛰어놀 수 있는 판의 전부가 아님을 알았으면 좋겠다.
괜히 여기서 좌절할 필요 없다. 새 판을 만들어 거기서 마음껏 펼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