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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꼬맹이의 45개국 엽서여행/대만

타이페이, 두려움을 넘어서다


새벽, 타이페이.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3일 전과 모든 게 똑같았지만, 모든게 다르게 느껴졌고 부답스럽거나 걱정스럽기보단 기대감과 자신감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든 일단 질러 놓으면 어떻게든 수습하게 되어 있는 것 같다. 사람은 가끔 절박할 필요가 있다. 물론, 나는 어린 나이에 쓸데없이 너무 절박했지만 말이다. 어떻게든 뭔가 이뤄내고 싶었고, 지금도 여전히 용서하지 못하는 그 사람들 때문에 너무나 처참하게 망가졌던 내 삶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어떤 용기가 생겼는지 대만으로 가는 편도 항공권과 용돈 20만원만을 들고 그렇게 떠났던 거다. 되어질 거라는 희망이나 계획으로 시작한 게 아니라, 최후의 몸부림같은 도전이었고 더이상 잃을 것이 없어서 무모하게 일단 던져 본 것이었다. 이러나 저러나, 죽을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학교를 자퇴하게 된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렇게 힘든 상황에 나 자신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내던졌던 두 번의 사건은 지금까지의 짧은 삶에 있어 가장 큰 터닝포인트 두 개가 되었다. 그만큼 절박했으니 바뀌었나 싶기도 하지만, 어린 나이에 그런 사건을 두 번이나 겪으니 이제는 그런 사건이 오지 않았으면 싶기도 하다. 솔직히 좀 많이 힘들다.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그대로 잠에 들었다. 꽉 채운 이틀의 일정을 소화하며, 몸도 마음도 꽤나 고생해서였을 거다. 앞으로의 향방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에 긴장이 풀려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다음날 아침엔 호스텔 매니저인 테리와 함께 객실 촬영과 한국어 번역작업에 관한 전체적인 설명을 들으며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사실 숙박업소의 객실촬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새로운 시도였지만, 스냅사진처럼 어떤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잡아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차근차근 전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생각보다 그렇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또, 구글에 hotel, hotel room같은 키워드만 검색해도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사진작가들이 찍은, 잘 만들어진 고급 호텔의 이미지들을 무한정으로 감상하고 연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작업을 진행하다 막히는 순간이 와도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다. 촬영 중에는 룸메이드 아주머니 한 분이 전담으로 붙었고, 매니저인 테리는 전체적인 윤곽과 세팅된 침구류의 디테일을 잡아 줬다. 12인 도미토리부터 더블과 트윈룸까지 꽤나 많은 종류의 객실을 촬영해야 했기에 작업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러나 그 과정이 힘들지는 않았다. 차근차근 디테일하게 한 컷씩 완성해나가야 하는 작업이라 재미있기도 했고 말이다. 사실, 내가 사진을 잘 찍어서라기보다 작업을 지휘하는 테리의 프로페셔널함 덕분에 수월하게 촬영을 잘 마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진을 찍다, 간식도 먹고, 점심도 먹고 하다가 촬영을 마치고 나니 네 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서른 장 내외의 완성된 사진을 만들기까지 거의 여섯 시간이 걸렸다. 생각보다 지치기는 했지만, 이제는 내가 이곳에 돌아온 목표를 향해 달릴 시간이었다.

카메라를 대충 정리해 놓고 가오슝에서 만들었던 스토리보드와 엽서 여러 세트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내가 묵은 숙소가 있는 동네는 시먼딩, 대만의 강남이나 홍대같은 느낌의 동네였다. 온갖 종류의 상점들과 식당, 술집과 호텔이 모여있는 젊은이들의 거리랄까. 배낭여행자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들도 많이 있는 곳이어서 시먼딩에 모여있는 사람들 중 1/3은 외국인인 것 같았다. 아, 사실 한국사람의 비율이 가장 많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알 수 없는 북경어의 향연 사이로 너무나 익숙한 언어가 쉬지않고 내 귀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참, 한국에선 한 블럭 건너 하나씩 있는 이니스프리와 에뛰드하우스 그리고 네이쳐리퍼블릭같은 화장품 브랜드 매장들이 여기에도 한 블럭 건너 하나씩 있었고 꽤나 많은 상점들이 너도나도 최신 한국 가요들을 틀어놨기 때문에 얼핏보면 명동에 와 있는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거리의 전체적인 느낌이 파악되고 나니 세세한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철사로 만든 작품들을 파는 노점상부터, 거리 공연자들과, 유혹적인 냄새와 취두부의 진한 향기를 동시에 풍기는 음식 가판들. 한국과 꽤나 비슷하지만 분명히 다른 구석이 있었다. 이 거리의 분위기를 둘러보고 나니, 내가 묵는 숙소의 위치가 시먼딩인 것이 꽤나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이런저런 사람들이 많이 섞여있고, 거리공연을 하는 사람들이 한 골목 지나 한 명씩 있는 곳이니 말이다. 왠지 나도 그 분위기에 잘 녹아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타이페이, 거리판매 첫 날의 전략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다가가보는 것이었다. 군중 속에서 의미없이 큰 피켓을 휘두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하고, 거절의 상처도 더 커지겠지만, 나를 막아서는 두려움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가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었다. A4용지 열 장에 담긴 내 메시지. 나는 그 메시지를 전해야 했다. 진심이 통해야만 가능한 프로젝트였다. 그래서 왠지 내 얘기를 잘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을 붙잡고, 한국에서 온 배낭여행자인데 1분만 시간을 내줄 수 없냐며 능청을 떨었다. 엄청 떨렸고, 그래서 내 얘기를 잘 전하지 못할 때도 많았지만, 그 방법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효과적이었다. 그날 하루종일 서너 세트만 팔면 성공이라고 맘먹고 나간 지 한두시간 만에 다섯 세트를 팔았으니 말이다. 물론 수십 명을 붙잡고 말을 꺼내야 했고, 수십 번의 거절과 실패를 경험해야 했다. 처음 두세 사람에게 거절당했을 때는 사실, 더이상 하고싶지 않다는 생각, 이렇게 해서 되기는 하는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그러나 내 이야기를 그래도 재미있게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낱장으로 한두장씩 사가는 사람도 있었다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만 했다. 거절당하는 것에 대해 당연하다고 여겨야 했고, 그 또한 배움이라고 끊임없이 되뇌어야만 했다.

여행 내내, 거리판매는 사실 정말 힘들었다. 더운 날씨가 일단 힘들었고, 들이는 시간에 비해 적은 판매량이 둘째로 힘들었고, 거절에 상처받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 셋째로 힘들었다. 궁극적으로는 온라인 주문을 통해 꾸준한 판매량을 가져가면서, 거리판매는 이벤트성으로 진행했으면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두려웠지만, 두려움을 넘어서야 했다. 달리 방법이 없어 시작한 프로젝트였지만, 어찌 시작했든 잘 해내야만 했다. 그래야만 했다. 사실 나도 철없는 스물한 살 꼬맹이이고 싶지만, 여행의 경험,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그 순간들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날 더 큰 사람으로 키워 놨다. 이 여행기는, 누군가에겐 꿈과 희망을 주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사실은 살기위해 몸부림쳐야만 했던 고통스런 기억의 조각들이기도 하다. 그냥 누군가는 알아줬으면 좋겠다. 내가 많이 아팠고, 힘들었지만, 어떻게든 그걸 이겨내보려했다는 사실을.

이제는 스물한 살 꼬맹이가 쓰는,

스무 살 꼬맹이의 45개국 엽서여행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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