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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꼬맹이의 45개국 엽서여행/대만

같은 곳, 다른 느낌


가오슝에서의 마지막 아침이 밝아 왔다. 언제나처럼 아침부터 맑고 뜨거운 날씨는 좀처럼 적응하기 힘들었다. 핸드폰을 열어 날씨 예보를 보니 역시나. 26도에서 시작해 34도까지 올라간단다. 하루 종일 밖에 있어야 하는 날인데.. 기분 좋은 아침이긴 했지만,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전날 먹다 남은 빵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서는 찬물로 세수를 하고 침대로 돌아왔다. 목적지는 시 외곽 지역에 있는 설탕 공장. 일제시대의 잔재인데, 일본이 물러간 이후에 그것을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박물관으로 보존해 둔 곳이라고 한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면서도 대만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 꼭 한 번 들러보고 싶었다.

설탕 공장은 지하철로 약 30분 거리. 지하철로 어딜 갔다 하면 한 시간은 걸리는 서울에서 살던 사람이라 전혀 문제 될 건 없었다. 아 참, 여행 중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인데, 대만은 나라가 꽤 작다 보니(남한의 1/3, 강원도 정도의 크기다) 지하철로 가는 30분은 먼 거리라고 느낀단다. 하긴, 종점 간 거리가 한 시간을 조금 넘기는 정도이니 그럴 만도 하다 싶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내 사고의 흐름이 닿은 곳은 코이(Koi)라는 물고기의 이야기였다. 이 물고기는 작은 어항에서는 5cm 남짓한 작은 크기로 자라지만, 큰 강에서는 1미터가 넘는 크기까지 자란다고 한다. 그래서 꿈을 크게 가지라는 격언을 전할 때 자주 소개되는 물고기이기도 하다. 어쩌면 나는, 어항에서 살던 물고기였을지 모른다. 항상 바다를 꿈꿔 왔지만, 막상 나오니 두렵기도 하고, 스쳐 지나가는 다른 물고기들에 비할 바가 못 되게 너무나 작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넓은 바다에서 살아가는 많은 물고기들처럼, 나 또한 큰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사라져 버리거나, 더 큰 물고기에게 잡아먹힌다 해도 후회는 없을 거란 생각도 했다. 그래도 최소한 내가 뛰어든 이 바다는, 내가 대어로 자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환경인 것임에는 틀림없었으니 말이다.

난 뭔가 만들어내는 것보다,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는 것보다, 본인 스스로가 어디에 속해있는지, 본인의 생각의 크기와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구렁이일지라도 용 틈에 끼어서 용과 비슷한 생각을 하면 이무기가 되고 용이 될 거란 꿈 정도는 가지게 될 거고, 우연이든 필연이든 여의주를 물 수 있는 기회가 불쑥 찾아왔을 때 그걸 물어보겠다는 노력이라도 하게 되지 않을까 해서다. 생각의 그릇. 때로는 현실에 부딪히며 작아지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 울타리가 모두 무너지기도 하지만 한 가지 변함없는 사실은, 사람은 본인이 가진 생각의 크기보다 더 크게 자랄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에 있을 때, 내 생각의 크기는 내가 속한 세상이 규정한 안전선보다 언제나 더 컸었다. 그래서 항상 답답했고, 마찰이 있었고,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그 안전선을 몰래 넘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고, 말뚝을 몰래 뽑아 두어 발자국 앞에다 박아놓기도 했었는데, 그 안전선이 갑자기 사라진 지금. 커지려는 압력은 그대로지만, 내 생각의 울타리를 밖에서 밀어 누르는 힘은 사라진 지금. 모든 벽이 풍선이 터지듯 무너져서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최소한 이곳의 안전선은 내가 서있는 곳에서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곳에 있었고, 그 넓이는 내가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을 만큼 충분했다. 30분은 짧지 않았다. 많은 생각이 오갔고, 많은 감정이 얽히고 풀렸으며, 내가 탄 지하철은 이제 땅 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리 높지 않은 건물들 사이로 논과 밭도 스쳐 지나갔다. 저 멀리엔 가오슝 도심의 큰 건물들도 보였다. 햇살이 기분 좋게 창을 타고 들어왔다.



챠오터우 설탕공장 역은 간이역의 느낌을 살짝 풍기는 조금은 허름한 지하철역이었다. 승강장과 바로 맞닿은 곳에 있는 개찰구를 지나면 바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구조였다. 벽에 붙어있는 약도와 구글맵을 번갈아 확인하고 방향을 잡았다. 지하철역에서 설탕공장 입구까지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었다. 그래도 입구까지 가는 길은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난 오솔길이었기 때문에 햇살이 따갑게 나를 괴롭히지는 않았다. 설탕공장은 입장료 없이 개방된 곳이었다. 한산했던 지하철역과는 달리, 어디에서 들 왔는지 박물관 안은 꽤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약도를 하나 받아 들고 공장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군데군데 녹이 슬어있는 커다란 건물과 그 주변을 지나는 배관, 그리고 설비들. 지금은 멈추어 있지만, 수십 년 전에는 이렇게 커다란 기계들이 맞물려 돌아갔을 거다. 가동 중인 것이든 아니든, 공장이란 곳에는 처음 와 본 터라 바다를 처음 본 꼬맹이처럼 신나게 뛰어다녔던 기억이 난다. 공장의 안쪽은 하나의 거대한 영화 세트장 같았다. 내 키 만한 커다란 톱니바퀴들과 수만은 배관들, 그리고 집채만 한 설탕 저장고까지. 군데군데 녹슬고, 제자리를 잃은 부품들이 나뒹굴고, 유리창은 깨져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들이 대만의 구슬픈 역사를 잘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이곳의 모습은 장황한 글보다 몇 장의 사진으로 전달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이만 줄여볼까 한다.

그날 저녁은 제주의 호스텔에서 일할 때 만난 가오슝 친구들과 함께 먹었다. 가오슝에서 유명한 대만식 훠궈 집이라고 했다. 내가 사는 나라에 놀러 온 손님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 친구들에게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했던 게 불과 몇 주 전인데, 이제는 내가 그들의 나라에 손님으로 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벌써 두 번째의 주객전도 만남인데도 말이다. 앞으로 이러한 만남들이 계속 이어질 것이고, 또 내가 계획한 이 여행은 그러한 만남들을 통해 이어나가야 할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사람과 사람. 그리고 그 안에서 꿈을 전하고 도움을 주고받고, 그렇게 하루하루 버텨 나가는 것. 조금씩, 내가 뛰어든 이 거대한 세상을 걸어갈 길의 윤곽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저녁을 먹고는 숙소로 돌아가 짐을 챙겨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이제 타이페이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이내 가오슝의 밤거리를 달리는 버스. 가오슝에서 보낸 꽉 채운 이틀의 시간은 이 여행에 있어, 그리고 그 이후의 삶에 있어서도 꽤나 큰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가오슝으로 향할 때도, 그곳에서 떠날 때도. 참 많은 생각이 오고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의 그런 고민들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겠지.

잠시 잠들었다 깨어 보니 버스는 타이페이 역 앞에 서 있었다. 대만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거의 같은 느낌이었다. 며칠 전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이곳에 내렸을 때와 비슷한 시간에, 똑같은 짐을 들고,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모든 것이 비슷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도 알았고, 늦은 밤거리를 걷는 것을 더 이상 겁낼 필요도 없었으며,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여행은 그렇게 나를 이전보다 조금 더 큰 사람으로 키워내고 있었고, 다행히 이 넓디넓은 바다는 나를 싫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틀 만에 다시 돌아온 타이페이. 같은 곳, 다른 느낌.

이제는 스물한 살 꼬맹이가 쓰는,

스무 살 꼬맹이의 45개국 엽서여행 에세이 



지난 이야기- 가자, 타이페이로

첫 이야기 읽으러 가기- 엽서여행. 대만, 그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