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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하고 지극히 현실적인

창의성, 그리고 사고의 회로



딩동 하는 소리와 함께 불쑥 찾아온 그녀. 친한 언니에게 기프티콘을 받았다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피자 한 판과 콜라를 들고 연락도 없이 그렇게 찾아왔다. 요 며칠 이상하게 피자가 당겼다나.. "얘기를 하지. 얼음이라도 얼려 둘걸”. 그랬더니 타이밍 좋게 공짜 피자를 얻었는데, 혼자 먹으려니 찔려서 그랬단다. 그렇게 식탁에 피자를 펼쳐놓고 얼음은 못 띄웠지만 그래도 시원한 콜라를 들이키며 오물오물 저녁을 먹는 중에, 흔히 삼발이라고 부르는 피자 고정핀이 내 눈에 들어왔다. "어, 나 그거 쓸 일 있을 거 같아. 나 가질래." 전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말똥말똥 쳐다보는 그녀. 밥 먹고 보여주겠다고 하고는 그냥저냥 저녁식사를 끝냈다. 그리고는 가위로 삼발이의 한쪽 다리를 잘라내고, 피자박스를 길게 잘라 만든 간이 자를 손에 들고 샤프로 슥슥 책상에 선 몇 개 긋고 점도 몇 개 찍어서 위치를 잡고는 그곳에 삼발이를 테이프로 고정시켰다.

그렇게 2분 만에 완성된 책상 빌트인 노트북 받침대. 여름이 된 이후로 맥북에서 발열이 꽤나 심하게 올라왔던 터라, 책상 뒤쪽에 데스크탑용 쿨링팬을 놓고 바람이 지나갈 통로를 만들기 위해 맥북 아래에 지우개 조각을 받쳐 두었었다. 유연한 재질이라 노트북이 상할 염려도 없고 고무라서 노트북이 미끄러지지도 않으니 괜찮기는 했지만, 한 곳에 고정시키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테이프로 붙이면 고무의 마찰력을 포기해야 하고, 양면테이프로 붙이자니 나중에 끈끈이를 닦아내는 게 고생스러울 것 같아서 그냥 받쳐놓고 썼더니, 노트북을 움직일 때마다 위치가 바뀌어서 다시 잡아줘야 했다. 그게 간단한 것 같지만 생각보다 귀찮은 작업이라, 해결할 방법을 찾던 중에 피자 삼발이가 눈에 들어온 거다. 박스와 함께 분리수거함에 모아져 온 동네 플라스틱 카페 정모에 나갈 운명이었을지 모르지만, 타이밍 좋게 내 눈에 들어서 책상 위로 승진했다. 책상 이야기에 몇 가지 덧붙이자면, 난 모니터 받침대를 만들기 위해 스피커 옆에 젱가 블록을 나사로 박아버리고 그 위에 원목 모양 시트지로 마감된 합판을 얹었다. 왼쪽 스피커는 책을 기대어 세워놓는 간이 책꽂이 용도로 쓰고 있고, 이마트에서 파는 양념 쭈꾸미볶음을 담았던 플라스틱 용기는 이리저리 자르고 붙이고, 고무줄과 이름표 자석을 달아 아이폰 거치대로 쓰고 있다. 치수를 재고 자르고 붙이고 하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녀는 한참 동안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렇게 얘기했다. "내가 널 좋아해서가 아니라 만날 때마다 진짜 그렇게 느낀 건데, 넌 확실히 똑똑한 것 같아. 그 왜, 공부 잘하는 똑똑한 거 말고 머리 잘 쓰는 똑똑한 거 있잖아. 와.. 난 피자 삼발이를.. 와… 오…"

“창의적이다”라는 개념을 그녀는 그렇게 표현했다. 내 방식대로 표현하자면, 창의력은 "반항적 사고력과 반항적 행동력”이다. 남들이 가지 않는 곳으로 가고, 남들이 보지 못 한 것들을 보는 것. 더 나아가 남들이 다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에 No혹은 Why라고 외칠 수 있고, 실수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일단 질러보는 것. 원래 있는 것들보다 더 나은 것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 난 창의력이란 말을 그렇게 해석한다. 창의적인 게 반항적인 거라니,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거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개똥철학이라고 생각하고 흘려 읽어도 되고, 여기까지 읽었던 것을 토대로 판단하기에 이 인간의 글은 정말 맘에 안 든다 싶으면 이쯤에서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도 된다. 아니, 그렇게 해 줬으면 좋겠다. 여긴 내 공간이고, 난 내 생각을 풀어놓을 뿐이니.

창의적인 행동은 반항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어떤 필요를 느낄 때, 재화를 지불하고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입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정확히 얘기하면, "개인은 소비자-기업은 생산자”라는 인식이 있다는 거다. 그것은 인간 사회를 관통하는 큰 흐름이다. 그러니,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 흐름에 반항하는 것이다. 물론 그 흐름의 세기가 세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서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다 혹은 창의적이다라고 느끼게 된다. 또 하나의 중요한 흐름은 "물체의 용도”에 관한 인식인데, 서두에 예를 든 쭈꾸미 용기와 피자 삼발이는 일반적인 인식을 토대로 생각하자면, 어떤 재화를 누리면서 생긴 부산물이자 폐기물이다. 일반적인 흐름이었다면 음식을 먹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버려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나는 ‘버려짐’으로 흘러가는 흐름을 깨고 그것에 다른 용도를 부여했다. 대세의 흐름, 순리를 따르는 것을 우리는 자연스럽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그 자연스러움은 정말 신이 세상을 만들 때 세상에 부여한 천부적인 자연스러움(예를 들면 어떤 물체는 주변의 물체와 비슷한 에너지 수준을 가지게 된다든가, 염분비가 일정하다든가 한)이라기보다 인간이 인식하고 교육하고, 다음 세대에 전파한, '전통’에 가깝다. 우리가 종이를 자를 때 도마와 식칼을 이용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하면 종이가 잘리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종이를 자를 땐 가위와 문구용 칼을 이용하라고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라면을 끓일 때 프라이팬이 아니라 냄비를 사용하는 이유는 그쪽이 더 편해서이지, 프라이팬으로는 조리할 수 없어서가 아니고, 양념쭈꾸미 용기와 피자 삼발이가 버려지는 이유는, 필요 없어서가 아니라(물론 필요가 없을 수도 있지만) 집에서 쓰레기를 제대로 치우지 않으면 엄마의 잔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정 나이에 학교에 보내진 이유는, 인간이 그런 시스템을 만들었고, 그렇게 해야 한다는 믿음이 사회 전반에 퍼져있기 때문이다.

창의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배워 온, 굳어진 사고방식과 세상에 대한 인식에 WHY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시작하며, 다들 그렇게 하는 것에 토를 다는 건 반항이다. 그러니 창의적이란 것은 반항적인 것이며, 자신의 아이만큼은 창의적인 아이로 키우고 싶다는 부모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을 창의력 학원에 보내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더 굳어진 사고방식을 주입하려 애쓴다. 창의력은 학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폭넓은 지식과 세계에 대한 이해는 창의성을 키우는 데에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너무 많이 아는 것은 오히려 사람을 굳게 만든다. 아이를 창의적으로 키우고 싶다면,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에 아이가 다른 의미와 정의를 부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어야 한다. 지금껏 살아왔던 당신의 생각은 철저하게 접어 두고, 아이가 자유롭게 세상을 인식하고 고민하며 사고의 회로를 늘려나갈 수 있도록 최대한 풀어주어야 한다.

다들 학교에 가니, 내 아이도 학교에 보낼 거긴 하지만 중퇴 후 대안학교에 보낸다든지 하는 다른 교육방식을 수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아이가 종이를 자르기 위해 식칼이나 과도를 꺼내더라도 혼내지 않고, "어머 그것으로도 종이를 자를 수 있구나, 하지만 조금 위험하니까 다른 도구를 사용해 볼까?"라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해야 한다. "이것은 A야”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사람들은 A라고 불러. 그리고 보통은 이렇게 사용해. 그런데 다르게 사용하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하고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사실 핵심이 그거다. 비판적 수용의 태도를 통해 얻어진 다양한 사고의 회로. 당신이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그리고 아이가 창의적인 사람으로 자라길 바란다면 정답을 들먹이며 반항적인 아이를 뜯어고칠 고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아이로 하여금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지 고민해야 한다. 정답은 없다. 우리가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중 많은 것들은 그저 많은 사람들이 믿는 허상일 뿐이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의 흐름을 깨고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니까”라는 본인의 사고와 고민의 흔적이, 본인이 선택한 것들에 남아있어야 한다. 부모 된 당신이 정답을 제시하고 퀴즈쇼를 이끄는 게 아니라, 아이가 본인의 삶을 자신의 생각과 고민과 깨달음으로 차곡차곡 쌓아나갈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사고의 회로는 생각한 만큼 자라나고, 성숙함은 고민하는 것에서 온다. 아이의 인내심은, 부모의 기다림에서 얻어지고, 아이의 온화함은 부모의 넓은 성품에서 온다. 조금 건방지게 얘기했나 싶다. 조금은 공격적으로 얘기했는지 걱정되기도 한다. 다만, 힘겹게 자란 아들내미라서 그런지, 세상의 부모들에게 이것만은 간곡히 부탁하고 싶다.


다그치치 않고, 강요하지 않고, 때리지 않아도, 아이는 잘 큽니다.

스스로 고민하고,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실수를 깨닫고,
넘어졌다가도 자신의 힘으로 다시 일어나서 걸어갈 수 있도록.

큰 방향만 잡아 주고, 너무 위험하다 싶을 때는 막아서고,
너무 심하게 넘어졌을 땐 위로의 말을 건네며 같이 일으켜 주면서,
보통의 경우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지켜봐 주세요.

그리고 자주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표현해 주세요.
쉽지 않은 건 알지만, 부탁드려요.

그게, 상처받은 아들내미가 꿈에 그리던 부모의 모습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