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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꼬맹이의 45개국 엽서여행/대만

예술가와 사업가의 경계에서



더위에 놀랐던 정신을 부여잡고 보니 시간은 다섯 시 반. 덩달아 저 아래에 숨어있던 배고픔이란 녀석도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이미 무언가를 제대로 하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라, 일단은 밥을 먹고 동네를 걸어보면서 도시의 분위기부터 파악해보기로 했다. 지하철로 몇 정거장 거리에 야시장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리로 출발했다. 북경어 발음으로는 리우허예스, 한국 발음으로는 육합 야시장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카메라만 들쳐 메고 길을 나섰다. 그새 해가 저 너머로 슬쩍 넘어가 버린 덕에, 가오슝 역에 내렸을 때만큼 뜨겁지는 않았다. 그래도 꽤나 더운 날씨.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에 근처 ATM을 먼저 찾았다. 안 그래도 20만 원(체크카드와 현금에 절반씩)으로 시작한 여행인 데다 타이페이에서도 현지 심카드를 사느라 돈을 좀 썼고, 가오슝 행 기차요금과 방값을 내고 나니 현금은 3만 원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시작부터가 난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 어렵지 않게 현금을 찾고, 가벼운 지갑을 털레털레 흔들며 야시장으로 향했다.


대만 제 2의 도시. 한국으로 치면 부산 같은 곳이어서 그런지, 야시장은 꽤나 바쁜 모습이었다. 해안에 자리 잡은 도시답게 해물을 파는 가판도 여러 개 있었고, 과일주스를 파는 곳도 있었다. 철판요리나 아이스크림, 만두, 떡, 수제 과자 등등. 상상할 수 있는 먹거리는 모두 있는 듯했다. 아, 아이스크림 가게는 식감이 쫀득쫀득하고, 점원이 손님에게 짓궂게 장난을 치기로 유명한 터키 아이스크림이었다. 푸짐한 인상의 터키 아저씨. 대만에 꽤나 오래 살았는지 북경어에도 능숙하다. 한 다섯 바퀴 정도 빙빙 돌렸다가, 줬다 뺐었다가, 던졌다 받기도 하고, 손님이 포기할 때 즈음 건네준다. 역시나, 명불허전. 그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가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아이스크림 수레 앞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걸어가다가 신기해서 잠깐 구경하다 하나 사 먹고, 왠지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같이 구경하고 싶은 맘에 사람이 더 몰려든다. 그렇게 다시 팔리고, 사람이 더 모이고. 선순환의 반복이었다. 밥 먹으러 우연히 나온 시장에서 거리판매의 모범답안을 보게 됐다. 어떻게든 사람들을 매대 앞에 모아놓는 것. 두어 사람이 모여 있으면 옆에 있던 한두 사람이 더 모이고. 그렇게 대여섯 명이 모여 있으면 금방 열댓 명으로 불어난다. 군중심리의 실전적 활용 방법이랄까. 사람의 뇌는, 같은 행동을 하는 세 명 이상의 사람들을 군중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정말로 가판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수가 세 명이 되는 순간부터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군중심리에 관한 책과 방송에서나 보았던 장면이 실제로 눈 앞에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신기하고 재밌었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배고픔도 잊고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더라. 꽤나 절박한 상황에 보게 된 모범답안이라 그랬던 것 같다. 엽서를 어떻게 팔아야 할지. 어떻게 살아남을지. 내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엽서 잘 팔아서, 살아 돌아간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 길에 참 예쁜 모습을 보았다. 우연히 세계에서 가장 예쁜 지하철역 중 하나로 손꼽히는 미려도(메이리다오, Formosa Blvd) 역을 지나게 된 것. 하마터면 정말로 그냥 지나칠 뻔했다. 숙소로 돌아가며 아무 생각 없이 걷던 역이 사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하철역이었고, 내가 중앙 광장을 지나던 그 순간에 한 커플이 그 장소에서 평생의 동행을 약속하고 있었다. 꽃다발을 들고 진지하게 한 마디, 한 마디 사랑스러운 말을 이어나가는 남자, 그리고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눈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새겨듣는 여자. 저 뒤엔 Marry Me!라고 쓰인 풍선을 들고 있는 남자의 친구들, 그리고 잔잔한 음악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퇴근길, 바쁜 걸음으로 걷던 사람들은 사진작가로, 또 객석의 청중으로 변했다. 모두들 지나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의 인생에서 절대 잊혀지지 않을 순간을 함께 축복해주고 있었다.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물을 흘리며 그의 품속에 안기는 여자.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웃으며 동시에 같이 눈물을 흘리는 남자. 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 둘 밖에 없는 기분이었으리라. 그들은 그렇게 한참을 끌어안고 있었다. 묵직한 감동이 지하철역 전체를 감싸 안았다.


우연이라기엔 너무나 필연적인, 그러나 우연일 수밖에 없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지는. 그런 사건들이 두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내 앞에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졌다. 사진을 찍고 글로 남기지 않았더라면, 너무나 거짓말 같아서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일들이 말이다. 어쩌면 귀국행 티켓을 취소하리란 결심을 그 순간에 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엽서는 아직 한 장도 팔아보지 못했지만, 최소한 방법은 얻었고, 여행의 맛을 알아버렸기 때문일까. 단지 20만 원이라는 예산의 압박이 주는 두려움을 깨고, 한국에서 한달음에 달려 나왔을 뿐인데, 나는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매일 이런 일들이 펼쳐질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것들은 서울에서 수백 번도 더 스쳐 지나가면서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그냥 평범한 일상의 사건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했던가, 이름을 불러야 비로소 꽃이 되는 거라고 했던가. 달라진 건 나였다. 낯선 환경에 곤두선 나의 모든 감각들이, 일상의 평범한 순간과 사건들에 요술을 부리고 있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고, 담아낼 수 있었다. 아니, 다들 보지만 그냥 지나쳐 가기 때문에 상처받고 마음을 닫고 꼭꼭 숨어있던 가치와 의미들이, 왠지 나에게 애절한 눈빛을 보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들의 손을 잡고, 그들을 다시 일으켜주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사진에 담았고,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고 있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난 예술가가 아니라 사업가라고 입술이 트도록 얘기하는 나지만, 그 순간만큼은 예술가였던 것 같다. 여행이 나를 그렇게 변화시키고 있었다. 이전과는 다른 수준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잔잔한 여운을 남긴 저녁식사. 그리고 돌아온 숙소, 내 방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일본인 아내와 함께 NGO에서 일하는 캐나다 아저씨. 타이페이에서 여행을 떠나 와 그 호스텔에서 스탭으로 일하며 지낸다는 대만 친구. 중국에서 유학하는 브라질 청년, 영국의 시골 동네에서 나고 자란 대학생, 일본에서 온 배낭여행자 그리고 한국에서 온 당찬 꼬맹이. 서로가 서로에게 지구 반대편 사람들인데도, 그들은 비빔면이 버무려지듯 새콤하게 섞여서 각자의 이야기들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엽서? 그날 저녁에 방 안에서만 두 세트 팔았다. 만 이천 원. 대만 돈으로 400$.

주어진 시간, 48시간. 시계가 돌아간 지 6시간째. 한국에서 온 꼬맹이는 더 이상 꼬맹이가 아니었다.


그렇게, 나의 여행은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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